[로망의 두 번째 단추로 선전포고나 때리는 이 남자]

꿈조차도 아직 다 여물지 않은 10대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른다. 그저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세상 모든 것과 투닥거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마다 두근거리는 게 일상. 무슨 일이건 손대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충만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스로의 미숙함에 걸려 넘어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빼고 걷다가 바닥의 맨홀 뚜껑에 걸려 자빠지는 뻔한 연출조차 사랑스러운 나이.

그 민망하고도 사랑스러운 시기를 이 소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만화 아니고서야 감히 바라지도 못할 행복이다. 서늘한 표정. 신선한 미소. 상큼한 매너. 가까이 다가서면 공기 중의 산소 함량이 높아지는 듯한 산뜻함. 부업인 학업, 본업인 수영, 취미생활인 여장까지도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잘난 녀석이기도 하지만, 하는 이상 완벽하게 해내고 안 되면 죽도록 노력해서 될 때까지 하라는- 그야말로 10대다운 허튼 소리를 언제나 진심으로 내뱉는다는데 진가가 있다.

글쎄,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학창 시절이란 것은,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 나를 향해 달려들며 고공폭격을 때려대던 시기였다. 작게는 패스트푸드점의 신메뉴부터 크게는 UN에 대한 평가까지, 세계는 변화로 가득 차 있었고 마음은 한순간에 천만가지 색깔로 변하곤 했다. 이 질풍 노도의 시기에 안정적이거나 마음이 편안한 상대 따위 무슨 의미일까. 조금만 힘주어 땅을 박차면 그대로 구름 위로 동실 떠올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상이 나를 향해 이렇게나 활짝 열려 있는데.

내가 이 때 원하는 것은 나와 함께 달리고, 나와 함께 엎어지고, 엎어진 모양새를 보며 서로 비웃고, 마음껏 갈구면서도 옆에 앉아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숨이 가쁠 때 서로 손 내밀어 잡아줄 수 있는 친구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어 감탄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어 뿌듯한 상대라면 더더욱 좋다. 거기다 약간의 욕심만 더 부리자면, 많이 앞서지는 않되 결코 따라잡히지도 않아 약오르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뛰게 해 주는 상대라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 이성 친구라는 것은 차라리 그 다음의 문제여도 좋다. 이 소년과 같이 하고 싶었던 학창 시절이란, 핑크빛이 아니라 그저 푸르른 청춘인 것을. 생각해 보니 이미 내겐 지나가 버린.


결혼을 하게 된다면, 역시 이런 남자가 결국은 좋지 않을까나. 하치가 내 앞에 있다면 두 손 꼭 붙들고 이 남자 절대 놓치지 말라고 백만 번 다짐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분명히 인간이기를 약간 포기한 선택이 된다. 이 남자가 자기 것이 된 여자에게 정말 많은 것을 줄 남자이긴 한데, 반대로 결코 주지 않을 것들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람으로써 쉽게 단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 남자는 안정을 준다. 렌이나 신, 노부처럼 자기 한 몸 스스로 서 있기도 불안하지 않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땅에 우뚝 두 발 딛고 서서 비틀대는 사람들까지 죄다 멱살 잡아 쥐고 버틴다. 그러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가장 불안한 놈부터 가차없이 날려버린다. 비정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게 당연한 선택이다.
그리고 방향성을 준다. 언제나 뒤에서 받쳐주는 야스의 안정감과는 그래서 다르다. 이 남자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앞장서서 걸어가고, 내가 할 일은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가는 것뿐이다. 그의 머릿 속에는 이미 계획이 다 잡혀 있고, 계산이 다 끝났다. 그 행로를 방해하는 것은 가차없이 처단할 준비도 되어있다. 그를 위해 자기 손 더럽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게 이 남자다. 남보다는 자기가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의지가 된다. 이 험한 세상에.

그러나 성격 좋은 것과는 애초에 담을 쌓은 이 남자, 아무에게나 덥석 손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다. 이 남자에게 의지하려 들자면 자기 의지는 일단 다른 데다 두고 오는 것이 좋다. 늘상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떨어졌으면, 결코 그를 거스르지 말라. 까다로운 남자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강자라고 분명히 인식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 기분을 맞춰주기는 어렵지 않다. 가끔 오직 이 남자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뿐이다. 자기가 저지르고 다니는 일 중 어떤 것이 미안한 일인지 알만큼의 상식은 갖추고 있고, 그에 대해 보상할 의지도 있다. 가끔 피치못할 일이니 알아서 참으라고 엄청 뻔뻔스럽게 얘기할 뿐이다.

고로 이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일종의 굉장한 타협이 된다.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을 잡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 삶이 송두리째 이 남자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흡수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될 것이고,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남편이 되어줄 것이며, 사실 대부분의 경우 내멋대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평생 내 손에 넣지는 못할 것이고,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 일말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내 자유까지도 사실은 허락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나 혼자 삶을 헤쳐가기 힘들어 누군가에게 기대야 되겠다는 항복 선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적군이라면 그냥 항복하고 편하게 사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종종 생각할 때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웃음)


‘작은 아씨들’ 은 확실히 캐릭터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작은 세계 안에는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라든가 치밀한 구성, 주목할 만한 사상이나 두드러지는 대립 구조 같은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적어도 내가)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네 자매가 만들어 내는 상당히 공감 가는 캐릭터들의 예쁘장한 앙상블이다. 꼭 밉지 않을 만큼만 뒤틀린 성격상의 단점이라던가, 사실 한 마디로 예쁜 거잖아― 싶은 외모라던가, 기본적으로 밑바탕부터 깔려 있는 따뜻한 선의가 만들어 내는 편안한 인물들에 대한 굉장히 안이한 애정이 내가 이 소설에 가지고 있는 눈먼 편애의 중심축이다.

그리하여 ‘이 아이들이 잘 되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실 어디로 보나 적당한 수준의 통속 소설에 불과한― 속편들까지 일일이 찾아가며 읽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바보 독자가 탄생한다. 그리고 각각의 자매들이 거느린 팬클럽은 그들의 일희일비에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으악, 조우가 로리를 버렸어!) 그리고 가장 조용하지만 동시에 가장 지극한 애정의 소유자로 추정되는 베스의 팬클럽에 애도를. 그대들의 마돈나는 승천하셨도다.

베스는 왜 죽어야 했을까. 그렇게 어렵게, 그렇게 극적으로 되살려놓은 캐릭터가 왜 속편에서는 그처럼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쓸쓸히 웃으며 속절없이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과거의 베스가 가지고 있던 그 고요한 파워를― 결국 모두가 언젠가는 돌아와 앉는 난롯가의 여신과 같은 위치를 왜 잃어버린 것일까.

선량한 허영심의 큰언니 메그는 건실하고 선량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다. 전투적인 도전 정신의 소유자였던 조우는 스스로 작가라는 명패를 획득한 어른이 된 뒤 자신의 꿈과 아내의 자리를 일치시킨다. (누구 말마따나 당시의 신여성인지도) 새침한 여성스러움과 드높은 야심을 겸비한 뉴타입 에이미는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만인의 이상형을 남편으로 획득한다. 시대와 작가의 안이함으로 극히 좁은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일지언정, 소녀가 여인이 되는 과정은 일종의 전투다. 그들은 자신의 외모를, 재능을, 의지를 총동원하여 세상과의 전쟁에 임하고 각각의 전리품을 얻는다. 웃음이나 모슬린이나 애정이나 착한 마음씨 같은 것으로 퍽이나 그럴 듯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어쨌든 전투인 것이다.

그래서 베스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베스의 사인(死因)은 그녀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는 데서 존재한다. 그녀는 조금도 전투적이지 않았고, 사실은 세상과 맞설 만한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세상이 아직 ‘집’으로 갈무리되고 있는 소녀 시절이라면, 난롯가에 앉아 있는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강한 존재다. 그러나 언니와 동생이 나팔 소리를 들으며 세상 밖으로 달려 나갈 때,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난롯가의 그녀는 무력하다.

큰언니가 자기 가정을 만들고, 동생이 유럽으로 날아가고, 작은 언니가 대도시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베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고, 아마 다락방에 올라갔을 것이다. 낡은 궤짝을 뒤지며 소녀 시절을 끄집어냈을 것이다. 서툰 글씨의 자작 신문, 종이로 만든 램프, 연극할 때 입던 가죽조끼, 에이미의 낡은 스케치북, 얼룩이 진 악보..... 그녀의 세계는 아직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괴리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그녀 자신도 죽는다. 자신을 뺀 모든 것은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Changeling: the Dreaming' 식으로 말하자면 베스의 죽음은 꿈의 죽음이다. 그것은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매가 그렇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옛날의 꿈은 죽어버렸다. 베스를 애도하는 것은 곧 사라져 버린 꿈을, 잃어버린 소녀 시절을 애도하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 독자들의 흘러간 소녀 시절까지도.

- 2003. 10. in 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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