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는 흑사병이 한창 나돌 무렵의 피렌체. 죽지 않으면 도망가는 사람들로 인해 나날이 도시가 텅텅 비어가던 어느 날, 작가의 소개에 따라 여자 7명, 남자 3명의 미남미녀 일행이 성당으로 모여든다. 외모만 잘난 것이 아니라 신분도 높고 돈도 있고 시간조차 남아도는 복받은 자들로, 잔소리할 친척들까지 죄다 도시를 떠나버리는 통에 그야말로 엔조이 라이프를 위한 조건이 완벽히 갖춰진 일행이었다. "여기 있어봤자 들리는 건 곡소리뿐이고 되는 일도 없으니 어디 경치좋은 데 가서 며칠 놀다 오자." 라고 먼저 MT 계획을 세우는 것은 여자들. 그치만 짐 들 사람도 필요하고 누가 시비걸면 대신 맞아줄 사람도 필요하니 남자 일행도 좀 끌어들이자, 는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 성당 구석에서 노닥대던 안면있는 청년들을 본 것이다. "아, 쟤 나 좋아하니까, 우리가 가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라는 잘난 척도 몇 마디 하며 여자들은 삼돌이들을 합류시키고, 청년들은 꿈이냐 생시냐 즐겁게 따라붙어 풍광좋고 시설좋은 별장으로 하인 줄줄 거느리고 호화 MT를 간다.
그러나 MT 다녀온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물놀이 좀 하고 주변 구경 좀 하고 나면 고기 구워먹고 술 마시는 것 빼면 할 게 없는 법. 하물며 얘네는 밥도 아줌마들이 차려주고 청소도 남들이 해 준다. TV도 없고 카드도 못 치는 시대에 심심함이 오죽할까. 오후 3시까지 퍼 자다가 결국 나무 그늘 아래 모여앉아 결론을 내린 것이, "우리 여기서 저녁 먹을 때까지 노가리나 까자." 는 것이었다. 1명이 이야기 하나씩 10명이 차례대로. 다음날부터는 좀더 본격적인 노가리 타임을 갖기 위해 사회자도 뽑고, 주제도 정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사회자를, 이들은 여왕 마마 내지는 황제 폐하라고 불렀다. (웃음)
데카메론은 바로 이 '열흘간의 이야기' 라는 뜻의 제목이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노가리인지라 요즘의 수다랑 크게 다를 것이 없어 '아는 사람들의 스캔들' 내지는 '요즘 유행하는 무슨무슨 시리즈' 내지는 '잘 나가는 사람들의 로맨스'가 그 주축을 이루었다. 피렌체의 이름난 가문 출신들이라고 하는 바가 있으니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자기 친척인 경우도 또 허다하고, 어디서 얻어들은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도 가끔은 있으나 보통은 이탈리아-피렌체 부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위해 빠순심이 다분한 루머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물론, 그 중심은 언제나 젊은 애들답게 음담패설에 있었다. -ㅂ-/
어디 그뿐인가. 대저 MT라면 커플 하나둘쯤은 만들어서 돌아와 주는 것이 예의. 작가는 애초에 이 남자들은 저 여자들 중에 찜한 애들이 있어요~ 라고 알려줘 놓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사랑의 작대기는 이어주지 않는다. 거기에 낚여버린 하릴없는 독자만이 이야기 중간중간 애들 이름이 나올 때마다 데이터를 뽑아가며 커플링을 했다. 얘는 누군가 찜했다는 것이 작가 공인이니까 어쨌든 맞겠지. 이 여자애가 나올 때마다 이 놈이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이 자들이 틀림없으렷다. 한 놈은 아예 MT 중 대놓고 삽질까지 한다. "제가 여러분 중 하나한테 반해서 그토록 쫓아다녔건만 날마다 차였습니다. 전 평생 이 따위로 살다갈 모양이니 오늘은 제가 사회를 보는 김에 다들 파토난 연애담이나 들려주세요." 하고 있으니 불쌍히 여긴 일행들이 밀어주는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가. 그야말로 훈훈한 청춘. 부록으로 한 사람이 한 곡씩 그 장절한 가사 눈뜨고는 못 봐 줄 당시의 유행가들도 첨부. (웃음)
본의아니게 데카르트라던가 그리스 철학자의 이름쯤으로 혼동당하면서 도대체 어느 나라의 무슨 작품인지도 감이 안 잡히는 제목, 더구나 단테의 '신곡' 과 쌍벽을 이루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이라고 소개를 하면 대체로 -_-;;; 한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지사. 그리하여 야설의 고전이자 로맨스의 보고인 이 작품이 이토록 속절없이 '그게 머야?' 의 수준으로 묻혀버리는 데는 항시 2g의 아쉬움이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서양문학사에서 가장 불펌을 많이 당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바, 한 번 읽어두면 곳곳에서 그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 재미가 또 쏠쏠하다. 초서와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들의 경우, 데카메론 빠돌이였음에 거의 틀림없는 작품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s.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데카메론의 소개 중 한 구절.
... 풍부한 생활 체험과 고전 및 남북 프랑스 문학에서 배양된 천재적인 이야기. 작가의 인간관찰에 대한 일대 집성으로서, 수세기에 걸친 설화의 호색성에 대한 독자의 그릇된 관심은 작자의 본의와는 관계가 없다.
... 보카치오 아저씨. 저들이 아저씨의 본의를 왜곡하고 있어요.
- 2006. 1. in egloo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