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들고 파리에 가다 (여행기)
중국인 부부의 프랑스 여행기. 문화대혁명의 한가운데를 걸어나온 이들에게 프랑스 대혁명의 울림은 남달랐다. 그들은 위고의 <93년>을 손에 들고 혁명의 흔적을 찾아 파리를 누빈다. 드넓은 유럽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어차피 다 볼 수 없다면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여행이 가진 뚜렷한 컨셉은 좋은 선배의 안내와 같았다. 참고자료의 역할을 제하고 나더라도, 인간의 위대함이 혁명과 사상이 아니라 관용과 박애에서 비롯됨을 나직하고 담담하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적어 내려가는 이 책의 내용은 매우 아름답다.

고리오 영감 (소설)
파리에 대한 우리의 수많은 이미지들은 대부분 발자크에게 빚지고 있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의 파리라면 틀림없다) 나는 그가 묘사하는 부도덕하고 활기차며 매정하고 우아한 파리와, 야심차게 그 도시의 입 속으로 뛰어드는 아름다운 청년들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급변하는 사회의 수많은 단면들과, 더 고귀하지도 덜 비루하지도 않게 정확한 '인간 그 자체' 를 그려내는 그의 재주는 거의 수수께끼에 가깝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벨 아미 (소설)
이것 또한 내가 좋아하는 '파리와 미청년' 의 대결 구도. 아주 오래 전 세로 인쇄로 읽었던 시절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 어렵게 어렵게 구했는데, 결론적으로 예전 것만은 못하다. (좋아하는 책에 대한 기억력은 집요에 가까운 수준이라, 아마 책 전체에 예전 판본에서 잘린 부분을 체크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각종 추한 인간 군상들은 차라리 발자크가 점잖아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데,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도 너무나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
가난하고 영리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유학 혹은 상경길에 오른 식민지 한국 청년들이 선택한 몇 갈래 길 중 가장 불운하고 고난에 찬 길을 선택한 이들이 아닐까. 그들은 살아생전 영화를 누려본 일이 없다. 늘 숨거나 도망쳐야 했고, 가족을 굶주리게 해야 했고, 몸 성할 날이 하루 없었으며, 대부분 천수를 누리지 못했고, 심지어는 죽어서도 잊혀져야 했다. 어떤 무형의 가치를 위해 이렇게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시대는 이제 가 버린 듯 하지만, 나는 그들의 피가 이 새로운 시대가 오게 만드는 역할의 한 축을 분명히 수행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은 핵심을 찌른다. 신념을 위한 그들의 생이 그저 헛되지는 않도록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아마 그들을 잊지 않는 것뿐이겠기에.

브로드웨이 인 드림즈 (뮤지컬)
아마 내가 최초로 본 한국 원안 뮤지컬인 것 같은데... 이런 걸 두 번 보기 두려워졌다. 우리나라의 컨텐츠 생산력이 정말 이 정도가 한계인 거라면, 한국 문화산업의 미래는 암담하다.

노다메 칸타빌레 (만화)
다른 니노미야 류가 나로서는 적응하기 힘든 수준인 것과 달리, 이 만화만큼은 언제나 유쾌하다. (아마 작가가 그만큼 자제력을 기른 거겠지) 클래식 입문서, 노다메라는 4차원 천재의 성장기, 더불어 치아키와의 로맨스까지 세 가지 축을 조율해 내는 솜씨는 압권이라는 표현을 쓸 만하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천재들 틈에서도, 콩쿠르 예선 탈락으로 귀국하게 된 윤롱에게 할애해 준 몇 페이지가 내게는 이 만화를 소장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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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6 12:12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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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나 2008/11/26 23:46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a,e,i,o,u가 들어있으면 차단됩니다. :D 답이 없는 트랙백 러쉬를 암울하게 응시하다 내린 극약처방이죠.

      날짜 갱신은 미처 신경쓰지 못했었는데, 앗 들켰다(...)의 심정이군요. 앞으로는 주의하여 완전범죄를 이루도록 하겠어요. 먹고 본 건 많은데 포스팅을 안 하니 계속 쌓이기만 하는군요..

      오클레르 선생님과 치아키 공연을 보러 온 부분은 저도 제일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예요. 특히 오클레르 선생님이 '좋은 로미오군요' 라고 악상이랄까 관상이랄까 봐 주는 부분이 모에하죠. 로맨스가 덜떨어진 느낌인 건 사실인데, 20권 정도부터는 슬슬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20권 아니었으면 저도 세가지 축이라는 표현은 못 썼을 듯) 로맨스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지라, 다메 양 같이 아직 덜 자란 캐릭터는 일단 닥치고 열심히 길러서 인간부터 만드는 게 로맨스의 첫걸음 아니겠습니까. (...)